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일본 대중문화를 국내에서 접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왜색’이라는 이유로 제한되었고, 일본풍 자체가 금기시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일본 애니메이션이 멀티플렉스 극장의 상영관을 가득 채우고, 일본 패션 브랜드와 음식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지만,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바꾼 계기는 1998년 김대중 정부 시절 이루어진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정책입니다.
이를 통해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이 정식으로 수입·상영될 수 있었고, 국내 관객들은 ‘러브 레터’(1999), ‘무사 쥬베이’(2000) 같은 작품을 스크린에서 처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후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지금은 일본 콘텐츠가 우리 일상 깊숙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최근 개봉한 ‘극장판 귀멸의 칼날 : 무한성편’은 이러한 흐름이 어디까지 확장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짙은 일본 색채에도 불구하고 개봉과 동시에 폭발적인 흥행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귀멸의 칼날은 어떤 작품인가
‘귀멸의 칼날’은 일본 만화가 고토게 고요하루가 ‘주간 소년 점프’에서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연재한 작품을 원작으로 합니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완결된 작품답게 이야기 전개가 군더더기 없이 단단합니다.
스토리의 중심에는 주인공 소년 탄지로가 있습니다.
가족을 잃고 혈귀로 변한 여동생 네즈코를 지키기 위해 귀살대에 들어가 성장해가는 과정이 주요 서사입니다.
처음엔 나약하고 순진했던 탄지로가 훈련과 전투를 거듭하며 최정예 대원으로 성장하는 모습은 소년 만화 특유의 ‘성장 서사’를 그대로 담아냅니다.
작품 속 배경은 일본 다이쇼 시대를 기반으로 하며, 일본풍 의상과 무기, 주술적 장치들이 곳곳에 등장합니다.
특히 혈귀와 맞서는 전투 장면은 하드 고어에 가까운 연출로, 팔다리와 목이 잘려 나가는 장면이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이러한 강한 비주얼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은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으며 일본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무한성편이 보여준 폭발적 흥행
지난 8월 22일 국내 개봉한 ‘극장판 귀멸의 칼날 : 무한성편’은 개봉 첫날에만 54만 명을 동원하며 올해 최고의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했습니다.
불과 열흘 만에 300만 관객을 돌파했고, 지금은 일본 애니메이션 역대 국내 흥행 4위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넘어서는 수치입니다.
해외 성적도 눈부십니다.
일본에서는 개봉 첫 주말 384만 명을 불러 모으며 역대 최고의 오프닝 기록을 세웠고, 한 달 만에 1,8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흥행 요인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1. 압도적인 액션 연출
귀멸의 칼날은 실사 같은 배경과 입체적 카메라 워크, 그리고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사운드 이펙트로 관객을 몰입시킵니다.
155분의 러닝타임 동안 전투 장면이 이어지지만 지루할 틈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2. 풍부한 캐릭터 서사
단순히 주인공의 성장만이 아니라 조연 캐릭터와 빌런의 과거사까지 세밀하게 풀어내며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유도합니다.
악역인 아카자의 비극적인 전사(前史)는 대표적인 예로, 그가 악당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합니다.
3. 코믹한 순간들의 균형
무거운 전투 신 속에서도 웃음을 주는 장면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노스케와 젠이츠 같은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작품의 긴장감을 풀어주며 관객들의 호감을 이끌어냅니다.
흥행을 이끄는 팬덤의 힘
멀티플렉스 관람객 통계를 보면, 이번 흥행은 특히 20대 남성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관객 중 41%가 20대였고, 성비 또한 남성이 58%로 절반을 넘어섰습니다.
이는 기존 한국 영화 흥행작과 뚜렷이 다른 양상입니다.
여기에 코로나19 시기 OTT 플랫폼을 통해 형성된 두터운 팬덤이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온라인을 통해 손쉽게 원작 애니메이션을 접한 젊은 세대가 이번 극장판을 기다렸다는 듯 몰려들었고, 특별 상영관과 굿즈 이벤트는 N차 관람을 유도했습니다.
입소문 또한 흥행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논란과 함께하는 흥행
하지만 긍정적인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 속 시대적 배경이 일본의 제국주의 시기인 다이쇼 시대라는 점, 주인공 탄지로의 귀걸이 문양이 욱일기를 연상시킨다는 점 등으로 ‘우익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실제로 한국 방영 버전에서는 귀걸이 디자인이 수정되었지만, 비판의 목소리를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귀살대 조직이 학도병을 떠올리게 한다는 지적도 있어, 작품이 일본 군국주의를 미화한다는 논란이 여전히 따라붙습니다.
광복절을 앞두고 진행하려던 프로모션 행사가 취소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하며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습니다.
논란 속에서도 극장에 발걸음을 옮기는 관객이 줄지 않는다는 점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위상과 팬덤의 결속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세대가 바뀐 문화 소비
한때는 수입 자체가 금지되던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이 이제는 한국 극장가의 주류로 자리 잡았습니다.
귀멸의 칼날 흥행은 세대가 변하면서 문화 소비 방식이 달라졌음을 증명합니다.
과거와 달리 젊은 관객들은 일본풍에 대한 거부감보다 작품의 완성도와 재미에 더 집중합니다.
또한 OTT와 글로벌 콘텐츠 시장의 확대는 특정 국가의 문화가 금세 국경을 넘어 대중화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일본 애니메이션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국 영화 시장에서 꾸준히 중요한 존재감을 발휘할 가능성이 큽니다.
‘귀멸의 칼날’은 단순한 애니메이션을 넘어, 한 시대의 문화 소비 변화와 세대 간 인식 차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